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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이 참선하여 득도한 곳이라 하여 도선굴이라고 하며, 암벽에 뚫려 있는 천연 동굴로 큰 구멍이라는 뜻으로 대혈(大穴)이라 하기도 한다. 최인재의 『일선지(一善誌)』에 근거하면 도선굴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시기는 조선 전기이고, 또 다른 이름인 대혈이라고 불렸던 것은 고려시대로 추측된다. 굴 아래 대혈사지 터, 현재 공원 주차장이나 백운재(白雲齋) 또는 경파정(景坡亭)이 있는 곳을 대혜 또는 다혈이라 부르니 대혈이라는 명칭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일선지』에 따르면 “넓이가 16척, 높이가 15척, 깊이가 24척으로, 그 안에 얽어 만든 집[構屋]이 두 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인동(仁同)·개령(開寧)의 수령과 향민 500~600명이 피난하였는데, 당시 바위틈에 쇠못을 박아 칡이나 등 넝쿨로 이동했던 상황이어서 왜군은 범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의 통로는 1937년 선산군 구미면에서 개통한 것이다.
금오산정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 금오산저수지로 유입하는 계류의 북서쪽 해발고도 약 480m의 사면에 위치한 자연동굴이다. 굴 내부의 길이는 7.2m, 높이 4.5m, 너비 4.8m이다. 주변의 지질적·토양적 특성으로 보아 화강암의 차별 침식의 결과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오산(金烏山, 977m) 대혜골의 해발고도 약 400m 지점에 있는 폭포로, 높이는 28m이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 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라고도 불린다. 폭포 아래에 형성된 넓은 소(沼)는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즐기는 곳이라 하여 욕담(浴潭) 또는 선녀탕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인조 때의 학자 여헌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문도들이 연중행사처럼 폭포를 찾아 목욕을 즐기고 시회(詩會)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폭포 옆 암벽에는 ‘욕담(浴潭)’이라는 예서체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장현광의 문도 중 한사람인 김공(金羾)이 폭포 근처 도선굴 아래에 움막을 짓고 학문을 닦다가 새긴 것이라 한다.
대혜폭포 오른쪽으로 펼쳐진 절벽의 위태로운 벼랑길을 따라 가면 신라 말의 고승 도선(道詵)이 수행했다고 알려진 천연동굴 도선굴이 있다.
1986년 10월 1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2호로 변경되었다. 고려 말기의 충신이며 학자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건립하였다. 1977년 구미시에서 건물을 보수하고 경역을 정화하였다. 앞쪽으로 흐르는 맑은 냇물과 계류와 수목들이 어우러져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채미정은 벽체가 없고 16개의 기둥만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건물로 중앙에 방 1칸을 만들고 사방에 마루를 둘렀다. 경역에는 숙종의 어필 오언시(五言詩)가 보존되어 있는 경모각(敬慕閣), 구인재 (求仁齋)와 비각 등의 건물이 있다.
길재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받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1419년(세종 1)에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채미(採薇)’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으로, 은(殷)이 망하고 주(周)가 들어서자 새로운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2층 기단 위에 세운 사각 3층 석탑으로서 몇 장의 판석으로 지복석(地覆石)을 만들고, 하대석(下臺石)과 중석(中石)을 1석으로 하여 8석으로 하층 기단을 구성하였으며 각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3주씩 있다. 갑석(甲石)은 수매로 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완만한 경사와 상층기단을 받기 위한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괴임이 각출되어 있다. 상층 기단은 수매의 판석을 세워 면석을 구성하고 각면에는 우주와 탱주의 2주가 표현되었다. 상층 기단 갑석은 4매로 덮었고 밑에는 부연이 있다. 윗면은 경미한 경사를 두고 각형과 호형의 쇠시리가 있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수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초층의 옥신은 특이한 구조로, 우주와 면석이 별개의 돌로 되었지만 남면에는 우주석에 광곽(框廓)이 조각된 석재를 좌우에 세우고 위에도 광곽이 조각된중방과 같은 석재를 얹어 그 하부에 감실(龕室)을 형성하였다. 옥개석도 받침, 옥개추녀, 윗면층단(層段)이 모두 별개의 석재로 되었고 각 부분도 여러 장으로 짜여져 있다. 옥개석의 받침과 상면의 층단은 각층마다 상하가 동일하며, 초층과 2층은 각 5단씩이고 3층은 4단이다. 상륜(相輪)에는 노반(露盤)이 남아 있을 뿐 그 이상은 없어졌다.
오목야(吳木野) ·중리(中里) ·불로산(不老山) ·월파정산(月波亭山) ·정묘산(鄭墓山) ·칠창동(七倉洞) 등 6개의 소지역 고분군으로 나누어졌으며, 총 205기(基)가 확인되었다.
분구(墳丘)는 원형과 표형(瓢形)이 있으며, 규모는 밑둘레 15~18m, 높이 4~5m의 특대형, 밑둘레 10~14m, 높이 3~4m의 대형, 밑둘레 7~9m, 높이 1~2m의 중형, 밑둘레 7m 이하, 높이 1m 이하의 소형 등으로 구분된다.
내부구조는 움무덤[土壙墓] ·독무덤[甕棺墓] ·구덩식돌널[竪穴式石槨) ·앞트기식돌방[橫口式石室] 등이 있다.
출토유물은 ① 토기:굽다리접시[高杯] ·단지[短頸壺] ·목항아리 ·바리[鉢] ·대부호(臺附壺) ·노형(爐形)토기 ·대부발형기대(臺附鉢形器臺) ·고배형기대 ·입큰잔[廣口杯] ·파배(杷杯) 등, ② 철기:철도자(鐵刀子) ·철촉(鐵鏃) ·철모(鐵鉾) ·쇠도끼 ·낫 ·고리큰칼[環頭大刀] 등, ③ 장신구:관편(冠片) ·대금구(帶金具) ·은가락지 ·수정곱은옥[水晶曲玉] ·유리옥 등이 있다.
1994년 9월 29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해평면 신양리에 사는 김성발이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이 개가 매우 영리하여 평소 주인의 뜻을 잘 알아차렸다. 하루는 주인이 술에 취한 채 길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들판에 불이 났다. 주인이 위험에 처하자, 개는 멀리 떨어진 낙강(洛江)까지 뛰어가 꼬리에 물을 적셔 와서 불을 끄기를 수없이 반복하던 중 탈진하여 죽었다.
무사히 깨어난 주인이 모든 상황을 깨닫고 이에 감동하여 개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주었다. 훗날 사람들이 개의 의로움을 기려 그곳을 구분방(狗墳坊)이라 하였으며, 봉분은 사람의 묘와 비슷하게 하여 지름 2m, 높이 1.1m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선산부사 안응창(安應昌)은 1665년(현종 6) 의열도(義烈圖)에 의구전(義狗傳)을 기록하고, 1685년(숙종 11) 화공이 의구도(義狗圖) 4폭을 남겼다. 화강암으로 된 의구도의 크기는 가로 6.4m, 세로 0.6m, 너비 0.24m이다.
1952년 도로공사로 인해 비 일부가 파손된 것을 봉분과 함께 수습하여 1993년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고 말끔히 정비하여 의구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1968년 12월 19일 국보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가 10m로 전탑형의 5층탑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선산읍에서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죽장사터에 있는 석탑이다.
18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상하의 이중기단에 5층 탑신을 세웠으며, 하층 갑석(甲石)은 높은 괴임 2단 위에 상층기단 면석(面石)을 올렸는데 현재는 파손되어 있다. 초층의 탑신은 남면에 불상을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 텅 빈 감실(龕室)이 있고, 여기에 문비(門扉)가 있던 흔적도 남아 있다.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6단이고, 7단의 층계식 낙수면으로 구성되었으며 낙수홈은 음각되었다. 2층의 옥개석 받침은 5단, 3층은 4단, 4층은 3단, 5층은 3단으로 구성되었고, 낙수면은 2층에서 5층까지는 6단으로 만들어졌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다.
지대석(地臺石)에서 노반까지 많은 부재, 즉 수백 매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이 석탑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이중기단을 형성하고 있으나,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표현하지 않았다. 낙수면의 층단은 전탑(塼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수법이다.
1684년 창건하였으며 건물은 총 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위에 정착하여 세거해 온 절강 장씨 문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장해빈(張海濱)은 중국 항주(抗州) 오강현(烏江懸) 출신으로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 장수로 와서 귀화한 뒤 군위에 정착, 세거(世居)하였다.
민병재(Min,Byoungjae)'s conversations
신라 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이 참선하여 득도한 곳이라 하여 도선굴이라고 하며, 암벽에 뚫려 있는 천연 동굴로 큰 구멍이라는 뜻으로 대혈(大穴)이라 하기도 한다. 최인재의 『일선지(一善誌)』에 근거하면 도선굴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시기는 조선 전기이고, 또 다른 이름인 대혈이라고 불렸던 것은 고려시대로 추측된다. 굴 아래 대혈사지 터, 현재 공원 주차장이나 백운재(白雲齋) 또는 경파정(景坡亭)이 있는 곳을 대혜 또는 다혈이라 부르니 대혈이라는 명칭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일선지』에 따르면 “넓이가 16척, 높이가 15척, 깊이가 24척으로, 그 안에 얽어 만든 집[構屋]이 두 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인동(仁同)·개령(開寧)의 수령과 향민 500~600명이 피난하였는데, 당시 바위틈에 쇠못을 박아 칡이나 등 넝쿨로 이동했던 상황이어서 왜군은 범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의 통로는 1937년 선산군 구미면에서 개통한 것이다. 금오산정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 금오산저수지로 유입하는 계류의 북서쪽 해발고도 약 480m의 사면에 위치한 자연동굴이다. 굴 내부의 길이는 7.2m, 높이 4.5m, 너비 4.8m이다. 주변의 지질적·토양적 특성으로 보아 화강암의 차별 침식의 결과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오산(金烏山, 977m) 대혜골의 해발고도 약 400m 지점에 있는 폭포로, 높이는 28m이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 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라고도 불린다. 폭포 아래에 형성된 넓은 소(沼)는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즐기는 곳이라 하여 욕담(浴潭) 또는 선녀탕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인조 때의 학자 여헌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문도들이 연중행사처럼 폭포를 찾아 목욕을 즐기고 시회(詩會)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폭포 옆 암벽에는 ‘욕담(浴潭)’이라는 예서체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장현광의 문도 중 한사람인 김공(金羾)이 폭포 근처 도선굴 아래에 움막을 짓고 학문을 닦다가 새긴 것이라 한다.
대혜폭포 오른쪽으로 펼쳐진 절벽의 위태로운 벼랑길을 따라 가면 신라 말의 고승 도선(道詵)이 수행했다고 알려진 천연동굴 도선굴이 있다.
동치6년(1867)에 華山隱士 李淋在의 비
1986년 10월 1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2호로 변경되었다. 고려 말기의 충신이며 학자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건립하였다. 1977년 구미시에서 건물을 보수하고 경역을 정화하였다. 앞쪽으로 흐르는 맑은 냇물과 계류와 수목들이 어우러져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채미정은 벽체가 없고 16개의 기둥만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건물로 중앙에 방 1칸을 만들고 사방에 마루를 둘렀다. 경역에는 숙종의 어필 오언시(五言詩)가 보존되어 있는 경모각(敬慕閣), 구인재 (求仁齋)와 비각 등의 건물이 있다.
길재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받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1419년(세종 1)에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채미(採薇)’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으로, 은(殷)이 망하고 주(周)가 들어서자 새로운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조선 인종 때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건물은 모두 소실되었으나 이곳 유림 손돈암(孫遯巖)이 위패를 선암산(船巖山)으로 피난시켜 병화를 면하였으며, 이로써 경상도에서 오직 이 향교만이 당초 그대로의 위패를 보존하고 있다.
1601년(선조 34)에 중건하고 1614년(광해군 6)에 읍 서편으로 이건하였다가 1641년(인조 19)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950년 6·25사변으로 삼성재(三省齋)·노사(奴舍) 등이 소실되었으며, 1968년에 광풍루(光風樓)를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성전, 정면 4칸, 측면 2칸의 광풍루, 4칸의 사물재(四勿齋), 신문(神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6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8m이다.
2층 기단 위에 세운 사각 3층 석탑으로서 몇 장의 판석으로 지복석(地覆石)을 만들고, 하대석(下臺石)과 중석(中石)을 1석으로 하여 8석으로 하층 기단을 구성하였으며 각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3주씩 있다. 갑석(甲石)은 수매로 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완만한 경사와 상층기단을 받기 위한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괴임이 각출되어 있다. 상층 기단은 수매의 판석을 세워 면석을 구성하고 각면에는 우주와 탱주의 2주가 표현되었다. 상층 기단 갑석은 4매로 덮었고 밑에는 부연이 있다. 윗면은 경미한 경사를 두고 각형과 호형의 쇠시리가 있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수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초층의 옥신은 특이한 구조로, 우주와 면석이 별개의 돌로 되었지만 남면에는 우주석에 광곽(框廓)이 조각된 석재를 좌우에 세우고 위에도 광곽이 조각된중방과 같은 석재를 얹어 그 하부에 감실(龕室)을 형성하였다. 옥개석도 받침, 옥개추녀, 윗면층단(層段)이 모두 별개의 석재로 되었고 각 부분도 여러 장으로 짜여져 있다. 옥개석의 받침과 상면의 층단은 각층마다 상하가 동일하며, 초층과 2층은 각 5단씩이고 3층은 4단이다. 상륜(相輪)에는 노반(露盤)이 남아 있을 뿐 그 이상은 없어졌다.
사적 제336호. 1990년 지정. 지정면적 22만 9245m2.
오목야(吳木野) ·중리(中里) ·불로산(不老山) ·월파정산(月波亭山) ·정묘산(鄭墓山) ·칠창동(七倉洞) 등 6개의 소지역 고분군으로 나누어졌으며, 총 205기(基)가 확인되었다.
분구(墳丘)는 원형과 표형(瓢形)이 있으며, 규모는 밑둘레 15~18m, 높이 4~5m의 특대형, 밑둘레 10~14m, 높이 3~4m의 대형, 밑둘레 7~9m, 높이 1~2m의 중형, 밑둘레 7m 이하, 높이 1m 이하의 소형 등으로 구분된다.
내부구조는 움무덤[土壙墓] ·독무덤[甕棺墓] ·구덩식돌널[竪穴式石槨) ·앞트기식돌방[橫口式石室] 등이 있다.
출토유물은 ① 토기:굽다리접시[高杯] ·단지[短頸壺] ·목항아리 ·바리[鉢] ·대부호(臺附壺) ·노형(爐形)토기 ·대부발형기대(臺附鉢形器臺) ·고배형기대 ·입큰잔[廣口杯] ·파배(杷杯) 등, ② 철기:철도자(鐵刀子) ·철촉(鐵鏃) ·철모(鐵鉾) ·쇠도끼 ·낫 ·고리큰칼[環頭大刀] 등, ③ 장신구:관편(冠片) ·대금구(帶金具) ·은가락지 ·수정곱은옥[水晶曲玉] ·유리옥 등이 있다.
1994년 9월 29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해평면 신양리에 사는 김성발이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이 개가 매우 영리하여 평소 주인의 뜻을 잘 알아차렸다. 하루는 주인이 술에 취한 채 길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들판에 불이 났다. 주인이 위험에 처하자, 개는 멀리 떨어진 낙강(洛江)까지 뛰어가 꼬리에 물을 적셔 와서 불을 끄기를 수없이 반복하던 중 탈진하여 죽었다.
무사히 깨어난 주인이 모든 상황을 깨닫고 이에 감동하여 개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주었다. 훗날 사람들이 개의 의로움을 기려 그곳을 구분방(狗墳坊)이라 하였으며, 봉분은 사람의 묘와 비슷하게 하여 지름 2m, 높이 1.1m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선산부사 안응창(安應昌)은 1665년(현종 6) 의열도(義烈圖)에 의구전(義狗傳)을 기록하고, 1685년(숙종 11) 화공이 의구도(義狗圖) 4폭을 남겼다. 화강암으로 된 의구도의 크기는 가로 6.4m, 세로 0.6m, 너비 0.24m이다.
1952년 도로공사로 인해 비 일부가 파손된 것을 봉분과 함께 수습하여 1993년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고 말끔히 정비하여 의구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1968년 12월 19일 국보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가 10m로 전탑형의 5층탑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선산읍에서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죽장사터에 있는 석탑이다.
18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상하의 이중기단에 5층 탑신을 세웠으며, 하층 갑석(甲石)은 높은 괴임 2단 위에 상층기단 면석(面石)을 올렸는데 현재는 파손되어 있다. 초층의 탑신은 남면에 불상을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 텅 빈 감실(龕室)이 있고, 여기에 문비(門扉)가 있던 흔적도 남아 있다.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6단이고, 7단의 층계식 낙수면으로 구성되었으며 낙수홈은 음각되었다. 2층의 옥개석 받침은 5단, 3층은 4단, 4층은 3단, 5층은 3단으로 구성되었고, 낙수면은 2층에서 5층까지는 6단으로 만들어졌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다.
지대석(地臺石)에서 노반까지 많은 부재, 즉 수백 매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이 석탑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이중기단을 형성하고 있으나,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표현하지 않았다. 낙수면의 층단은 전탑(塼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수법이다.
1684년 창건하였으며 건물은 총 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위에 정착하여 세거해 온 절강 장씨 문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장해빈(張海濱)은 중국 항주(抗州) 오강현(烏江懸) 출신으로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 장수로 와서 귀화한 뒤 군위에 정착, 세거(世居)하였다.